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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편집부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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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Bicie w kilka bębnów, 폴란드어 원작을 한국어로 옮긴토카르추크의 두 번째 단편집이자 가장 대표적인 단편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흥미로운 건 작가 자신이 이 책을 "서술자를 훈련시키기 위한 일종의 체육관 같은 책"이라 불렀다는 점이다. 그 말을 곱씹어 보면, 이 단편집은 완성된 이야기들의 모음이라기보다, 이야기하는 행위 자체를 연습하고 실험하는 현장에 가깝다는 인상을 준다.수록된 19편의 이야기들은 어디로 튈지 모르게 역동적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등장인물들의 스펙트럼이 인상적이다. 책을 읽다 모험에 휘말리는 추리소설 팬, 비상계엄령이 내린 낯선 도시를 헤매는 교수, 낡은 극장에서 홀로 춤추는 나이 든 발레리나 — 이들은 시간도 공간도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해 있지만, 어딘가 공통된 감각으로 묶여 있다. 바로 자기 존재의 경계가 확정되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감각이다.첫 번째 단편, 거울 속으로 들어가는 독자수록작 중 첫 번째 이야기인 <눈을 뜨시오, 당신은 이미 죽었습니다>가 특히 인상 깊다. 주인공 C는 추리소설의 열광적인 팬으로, 잔뜩 기대를 품고 읽기 시작한 새 소설의 진행 속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쯤 됐으면 진작에 시신 하나쯤은 발견되어야 하는데"라는 조바심을 느낀 그는 결국 스스로 이야기 속으로 뛰어들어 사건을 저지르기 시작한다.이 설정이 재미있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메타픽션적 장난이 아니라는 데 있다. 독서라는 행위 자체에 대한 은유로 읽힌다.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C와 같지 않은가 — 이야기가 우리 기대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실제로 개입할 수는 없지만 머릿속에서는 이미 사건을 앞질러 가고, 결말을 상상하고, 때로는 인물의 선택에 분노하기까지 한다. 토카르추크는 그 상상의 틈을 문자 그대로 찢어서 C를 소설 속으로 밀어넣는다. 읽는 자와 쓰이는 자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 그것이 이 단편집 전체를 관통하는 첫 번째 신호탄인 셈이다.표제작 — 창밖의 세계와 '나'라는 문장들표제작 <여러 개의 북을 두드리며>는 훨씬 조용한 방식으로 같은 질문을 던진다. 특별한 사건도, 뚜렷한 갈등도 없이, 첫 문장부터 "그러니까 내 모습은 이렇다"로 시작해서 아파트 창문 너머로, 언어 수업에서 보이는 것들이 화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가 이어진다.사건 없는 소설이라는 게 처음엔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곱씹어보면 이것이야말로 토카르추크가 이 책 전체에서 시도하는 실험의 핵심 아닐까 싶다. 플롯이 아니라 관찰하는 의식 그 자체를 서사의 동력으로 삼는 것. 창밖을 보는 행위, 언어를 배우는 행위처럼 지극히 사소한 일상의 조각들이 한 인간의 자아를 구성해가는 과정을 문장으로 포착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북을 두드린다"는 제목의 이미지 자체도, 어쩌면 사건이 아니라 리듬으로, 반복되는 지각과 사유의 박동으로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만 이 해석은 원문 전체를 읽지 못한 상태에서의 추측이라, 확신하기는 어렵다).이야기를 완성하는 건 독자다 — '별자리 소설'이 단편집을 관통하는 작법을 두고 평자들은 '별자리 소설'이라 부른다. 작가는 특정한 해석이나 결론을 제시하는 대신 독자가 흩어진 이야기 조각들을 자유롭게 이어 붙여 자신만의 의미를 찾도록 이끈다는 것이다. 이 표현이 마음에 든다. 밤하늘의 별들은 애초에 서로 아무 관계가 없다. 그것들을 선으로 이어 사자자리나 오리온자리라는 의미를 만드는 건 바라보는 인간이다. 토카르추크는 19편의 이야기를 그렇게 흩뿌려 놓고, "당신이 이야기를 완성하시오"라고 말을 건네는 셈이다.이건 단순한 형식적 유희로 그치지 않는다. 독자를 수동적인 감상자가 아닌 서사의 적극적인 참여자로 끌어들인다는 건, 결국 이 책이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가'라는 질문 자체를 독자에게 되돌려준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완독한 사람들 각자가 상당히 다른 책을 읽었다고 느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별자리를 그렸느냐에 따라

아직 읽고 있는 중이지만 재밌네요. 흡입력 있고 문장력이 대단한 소설입니다.

이런류의 소설을 보면 주로 주인공은 어린시절을 회상하며 그 속에서 만났던 특이하고 독특한 인물을 서술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이야기를 서술하는 주인공또한 남들과 다른 시선을 갖고 있으며 어릴적 자살 생각을 한번씩 하고 독특한 면이 있다. 좀머씨의 이야기도 위와 비슷한 형식으로 이야기가 이뤄졌다. 다만, 조금 다른 부분이 있다면 좀머씨의 죽음을 주인공이 목격했고 죽음을 고귀하게 묵인해줬다는 것이다. 초반에 열심히 걸어다니는 좀머씨 얘기를 읽으며 대체 이유가 뭘까 왜 저렇게 걸어다닐까 목적이 있는걸까 하는 무한한 의문과 호기심을 품었다. 하지만 이야기가 중반기로 흐를수록 나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보통의 사람들과 다른 행동을 하고 다른 길을 가는 사람을 틀렸다고 하는 사람들의 시선. 그리고 그와 둘러싼 무수한 소문과 관심들이 작가가 진정으로 얘기하고 싶은 내용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또한 좀머씨를 보면 왜저럴까 의문을 품고 지속적으로 답답함을 갖고 있었으니 타인을 비난할게 못된다. 좀머씨의 삶이 진심으로 안타까우면서도 그럼에도 누구보다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개개인의 삶을 존중하고 사랑하기. 멋대로 생각하고 해석하지 않기. 틀린게 아니라 다르다는 것을 깨우치기. 내가 배워야할 점이자 어려운 부분들이다.

『설국』을 펼치기 전에 이미 여러 말을 들었다. 눈 덮인 풍경의 서정, 일본 문학 특유의 여백미, 노벨문학상 수상작다운 격조. 그래서인지 읽는 내내 그 아름다움을 찾으려 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그것이 쉽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름답다는 말을 너무 많이 들은 탓인지, 아니면 내가 이 소설이 요구하는 독자가 아닌 탓인지. 읽고 난 지금도 그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아무것도 하지 않는 남자소설의 구조는 단순하다. 도시 남자 시마무라가 설국의 온천 마을을 찾아오고, 그곳의 게이샤 고마코와 관계를 이어간다. 가끔 요코라는 여자가 등장하고, 이야기는 뚜렷한 사건 없이 흘러가다 끝난다. 가와바타가 공들인 것은 플롯이 아니라 분위기라는 것을 안다. 그렇다 해도 그 분위기를 받쳐야 할 인물들이 문제였다.시마무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방관자다. 고마코를 원하면서도 진심을 주지 않고, 요코에게 끌리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의 수동성은 동양적 무위(無爲)로 읽힐 수도 있겠지만, 읽는 동안 느껴지는 것은 철학적 초연함이 아니라 그냥 무책임에 가까웠다. 고마코는 시마무라를 향해 감정을 쏟아붓고, 그는 그것을 받으면서도 끝내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는다. 그 관계가 아름다운 허무로 읽히려면 아마 독자가 시마무라의 시선에 충분히 동조해야 할 텐데, 그게 잘 되지 않았다. 그의 눈을 통해 설국을 바라보는 동안, 나는 계속 고마코 쪽에 마음이 쏠렸다. 그리고 고마코의 시선에서 보면 이 소설은 꽤 불쾌한 이야기가 된다.익숙해진 문법의 피로일본 문학을 처음 접한 작가가 야스나리는 아니었다. 하루키에서 시작해 다자이 오사무, 미시마 유키오를 거쳐왔는데, 그 과정에서 이미 공허함과 상실, 자결에 이르는 어떤 정서적 패턴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니 『설국』에서 비슷한 감수성을 또 마주했을 때, 새로운 충격보다는 고리타분함에 가까운 피로가 먼저 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체념, 설명되지 않는 공허, 그것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방식.처음 이 문법을 접했다면 낯설고 매혹적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여러 번 비슷한 정서를 통과한 독자에게는 그 포장지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다자이 오사무의 자기파괴가 날것이라면, 미시마의 그것은 탐미적으로 연출된다. 야스나리의 공허는 그보다 훨씬 조용하고 간접적인데, 그 조용함이 오히려 더 답답하게 느껴졌다. 격렬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완전히 무감하지도 않은 어중간한 자리. 그 자리에서 소설은 계속 아름다움을 주장한다.설명을 회피하는 것을 미학이라 부를 때소설 후반부에서 요코가 불 속으로 떨어지는 장면이 있다. 자살인지 사고인지 모호하게 처리된다. 가와바타가 의도적으로 남긴 여백이겠지만, 이 지점에서 느낀 것은 신비로움이 아니라 설명을 회피하는 것을 미학으로 포장하는 데 대한 피로였다. 왜 요코인가, 왜 그 순간인가. 작품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 침묵을 여백의 미로 받아들이는 독자가 있을 것이고, 그냥 설명이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독자도 있다. 나는 후자였다.일본 문학 전반에서 반복적으로 마주치는 이 패턴 — 이유 없는 소멸, 설명되지 않는 죽음, 그것을 둘러싼 침묵 — 이 처음에는 깊이처럼 느껴지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회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설국』은 그 임계점을 넘은 뒤에 읽은 책이었는지도 모른다. 만약 순서가 달랐다면, 야스나리를 먼저 읽었다면, 다르게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든다. 그러나 독서는 언제나 그 사람이 그 시점에 읽은 것이고, 나에게 이 책은 그런 책이었다.그럼에도『설국』이 나쁜 소설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가와바타의 문장이 정교하다는 것, 공간을 묘사하는 방식이 독특하다는 것은 인정한다. 특히 소설 첫 문장 —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 은 분위기를 단숨에 잡아당기는 힘이 있다. 그리고 눈 내린 마을의 풍경을 묘사하는 장면들에서, 가와바타가 공간에 얼마나 예민한 감각을 가진 작가인지는 느껴진다.다만 이 소설이 요구하는 독자는, 인물의 내면보다 분위기에 먼저 반응하고, 설명되지 않는 것을 불만이 아닌 여운으로 받아들이며, 일본 특유의 정서적 문법에 아직 낯선 사람일 것이다. 나는 그런 독자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소설의 문제인지 독자의 문제인지는, 어느 쪽도 단정 짓고 싶지 않다.

토카르추크의 단편들을 읽으면서 계속 떠오른 단어는 '균열'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들은 대부분 평범한 일상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일상의 표면에 작은 틈이 생기고, 독자는 그 틈 사이로 뭔가 낯설고 불편한 것이 스며드는 것을 느낀다. 괴물이 등장하거나 세계가 뒤집히는 방식이 아니다. 익숙한 것들이 조용히 낯설어지는 방식이다. 이 책에 수록된 열 편 중 유독 오래 남은 네 편을 꼽아본다.병조림50대 남자의 이야기다. 연금 생활자인 노모에게 기대어 살던 그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혼자 남겨진다. 어머니가 남긴 유산은 현금도 집도 아닌, 지하 창고를 가득 채운 병조림들이다. 수십 년에 걸쳐 담근 음식물들. 그는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뒤 영국과 폴란드의 축구 경기를 틀어놓고 병조림을 하나씩 따서 먹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그냥 먹는다. 그런데 점점 이상한 것들이 나온다. 2001년이라는 날짜가 붙은 토마토 소스 속 스펀지. 이 지점에서 소설은 조용히 궤도를 이탈한다. 토카르추크는 이것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는다. 병조림 안에 어머니의 시간이 담겨 있다는 것, 그것을 먹어 들어간다는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독자가 스스로 감각하도록 내버려둔다. 읽고 나서 한참 동안 어머니라는 존재와 그 흔적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솔기아내를 잃은 노인 B의 이야기다. 그에게 어느 날부터 사물의 솔기가 눈에 거슬리기 시작한다. 양말의 솔기, 볼펜이 남기는 얼룩의 색깔, 우표의 모양. 익숙하게 여겨온 것들이 하나씩 낯설게 느껴지고, 세상이 점점 자신에게 적대적인 공간으로 변해간다. 처음에는 단순한 노인의 편집증처럼 보인다. 그런데 계속 읽다 보면 이것이 슬픔의 다른 형태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내가 있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 아니 정확히는 아내가 완충해주고 있었던 것들이 이제 필터 없이 직접 부딪혀오는 것이다. 노인이 무너지는 것은 솔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함께 견딜 사람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토카르추크는 이 과정을 감상적으로 처리하지 않는다. 건조하고 담담하게, 그래서 더 쓸쓸하게.녹색 아이들1656년 볼히니아를 배경으로 한다. 스코틀랜드 왕과 함께 여행하던 사절단이 숲에서 이상한 존재들을 발견한다. 초록빛 피부를 가진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인간의 언어를 모르고, 식물처럼 보이는 이 아이들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다. 이 단편은 판타지처럼 시작하지만 실제로 다루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타자를 마주했을 때 인간이 보이는 반응이다. 사절단의 주치의 윌리엄 데이비슨이 기록자의 시점으로 이 사건을 서술하는데, 그의 언어가 점점 한계에 부딪히는 과정이 흥미롭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는 언어의 안간힘. 그리고 결국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 채로 남는 것들. 이 작품이 이 단편집 전체의 성격을 가장 잘 요약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트란스푸기움한 여성이 인간으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다른 생명체로 전환하는 시술을 받으러 가는 이야기다. 토카르추크는 이 설정을 SF적 흥미거리로 쓰지 않는다. 작품 안에서 한 인물이 묻는다. 당신과 저 낙엽송 사이의 간극이 낙엽송과 딱따구리 사이의 간극보다 더 심오하고 철학적인 이유가 무엇이냐고. 이 질문이 소설 전체를 떠받치고 있다. 인간 중심주의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고, 자신이 속한 종(種)에서 이탈하고 싶다는 욕망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읽고 나서 불편함이 남는 것은, 그 욕망이 완전히 낯설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네 편을 읽으며 공통적으로 느낀 것은, 토카르추크는 기묘함을 목적으로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묘한 요소들은 언제나 어떤 질문을 운반하는 수단이다. 죽음과 남겨짐, 상실과 고독, 언어의 한계, 인간이라는 범주의 경계. 그 질문들이 판타지나 초현실의 포장지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정면으로 마주하기가 수월하다. 직접 말하면 무거워질 것들을 기묘한 이야기로 비틀어 내밀 때, 독자는 방어 없이 그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 방식이 이 작가의 가장 영리한 점이라고 생각한다.